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성실하지만 예민한 청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네덜란드 북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 준데르트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목사였습니다.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던 탓에 15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구필화랑 헤이그 지점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고흐는 성실한 청년으로 인정받았지만, 런던과 파리 지점에서 일을 하던 때에는 일에 소홀하고 손님들과 시비가 붙어 싸우기도 하면서 고흐의 예민한 성격 때문에 사회생활이 평탄하지는 않았습니다.
직장에서 쫓겨난 고흐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목회자 자격시험공부를 했지만 1년이 지나도 큰 성과가 없었기에 그는 공부를 그만두고 전도사 훈련을 받기 위해 벨기에의 탄광촌 마을 보리나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가난하고 비참한 생활을 몸소 체험하면서 열심히 전도를 하지만 교회에서 나온 감찰관이 고흐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는 고흐를 해고하였습니다.
고흐는 좌절하고 방황하였지만, 자신의 동생 테오의 권유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고흐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곧잘 그려내곤 했으며 고흐 스스로도 다른 일을 할 때보다 그림을 그릴 때 마음이 편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27세의 늦는 나이에 고흐는 방황 끝에 화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화랑에서 일을 하던 시절, 밀레의 그림에 큰 감동을 받게 된 고흐는 '감자 먹는 사람들'같이 가난한 서민들의 삶을 어두운 색조로 그리기 시작합니다. 이후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접하면서 그림의 색도 밝아지고, 가는 선과 대담한 색, 점 모양의 특징을 지닌 붓놀림을 많이 이용하여 그림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도시 생활에 지친 고흐는 남쪽 지방에 위치한 아를로 이사를 합니다.
이사한 집이 마음에 들었던 고흐는 방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내는데, 이 그림이 바로 '고흐의 방'입니다.
고흐는 아를에서 시골의 풍경이 주는 자연의 색깔에 깊이 빠져들어 매료되어 밤새도록 그림을 그렸고 이때 고흐만의 그림 스타일인 강렬한 색채의 대비와 거친 붓놀림의 조화를 완성했습니다.
고흐는 자신이 머물고 있는 노란 집에 예술가들과 함께 작업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기를 꿈꿨으며. 고흐의 초대에 고갱만이 와서 함께 지냈지만 고흐와 고갱은 예술에 대한 생각이 너무나도 많이 달랐습니다.
고흐와 고갱의 갈등이 심해지던 어느 날,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르고 말았으며 이 일로 인해서 고갱은 고흐를 떠나 버리고 마을 사람들은 고흐를 '빨강머리 미치광이'라고 부르며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고흐는 37년이라는 짧은 생을 스스로 마감해 버립니다. 늦은 나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지만, 고흐는 10년 동안 800여 점의 유화, 1,000여 점이 넘는 스케치를 그려낸 그림을 사랑한 열정적인 화가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흐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단 한 점의 그림만 팔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흐가 세상을 떠나고 11년 뒤인 1901년 파리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고흐의 그림이 큰 인기를 끌었으며, 1914년 동생 테오의 부인이 고흐와 테오가 15년간 주고받은 편지를 책으로 내면서 세상에 더욱 알려지게 되어 고흐는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야 유명해진 화가가 됩니다.
너무나도 짧은 생을 마치고 떠나버린 화가, 본인과 본인의 그림들이 자신이 생을 마감하고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유명해져서 자신이 얼마나 유명해지고 자신이 그린 그림들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며 사랑받는지 느끼지 못하고 떠나버렸지만, 그의 작품은 현재까지도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 사이에 순위가 매겨지고 있으며 그의 강렬했던 그림들은 야수파, 초기 추상화, 표현주의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은 빈센트 반 고흐가 자신의 동료 화가인 폴 고갱과 말다툼을 하던 끝에 자신의 귀를 자른 사건 이후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1888년 반 고흐는 프랑스 남부 아를로 이주하였으며, 그곳에서 화가들의 공동체를 만들려는 꿈에 가득 차있었습니다.
반 고흐는 이전에 파리에서 만난 적이 있는 폴 고갱에게 편지를 보내서 아를에서 함께 작업할 것을 권하였고 이 둘은 함께 하게 되지만, 개성이 강하고 자기중심적인 고갱과 윤리적이며 격정적인 고흐의 만남은 예술적인 가치관에서 너무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특히 그림에 관해서는 서로 논쟁과 화해를 반복하면서 다툼의 강도가 점점 높아져 갔으며 마침내 고갱은 자신은 다시 돌아가겠다는 편지를 고흐의 동생 테오에게 쓰겠다고 통보하였지만 고흐는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크리스마스를 이틀 남겨둔 날 고흐는 면도칼을 손에 들고 고갱에게 달려들었다고 합니다. 그 후 고흐는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왼쪽 귀를 잘라 버리게 됩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 이후 고갱은 파리로 떠나버렸고, 고흐는 병원에 혼자 남겨지게 됩니다 이때 그려진 그림이 바로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으로 동생 테오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그린 것으로 "편지보다는 초상화가 내 상태를 더 잘 보여줄 거라고 믿는다"라며 이 작품을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은 고흐 자신의 고통과 상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이에 굴복하지 않는 창작에 대한 열정이 그림의 강한 눈빛에서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그림에서 눈여겨 볼만한 점이 하나 더 있는데, 그림의 배경에 그려진 후지산이 보이는 일본풍의 그림은 그가 일본 판화에 빠져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요즘 유명한 화가들의 소개와 그들의 작품들을 소개해주는 글을 쓰면서 새로운 재미를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그림을 책으로 읽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며, 특히나 이번 빈센트 반 고흐는 글을 쓰면서 그가 얼마나 그림을 사랑했는지 느껴지면서 귀를 스스로 잘라버린 것은 무섭긴 하지만 너무나 짧은 생을 스스로 마감해 버리고 시간이 지난 후 자신의 그림이 빛을 보게 되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떠나버린 점이 너무나 속상했습니다.
여담으로 고흐가 귀를 자른 이유에 대해서 글에서 고갱과의 다툼 때문이라고 하였지만 또 다른 가설 2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70도의 고도수 증류술인 녹생요정 압생트를 마시고 나서 자른 거라는 설과, 두 번째는 자신의 동생 테오의 결혼소식을 듣고 테오가 결혼을 하고 자신에게 경제적 지원이 멈출까 걱정하여 귀를 잘랐다는 설도 있다고 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