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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풍속화가 단원 김홍도, 단원풍속도첩

by kihoon.story 2023. 8. 26.

조선의 풍속화가 단원 김홍도

조선의 풍속화가 단원 김홍도

조선의 풍속화가 단원 김홍도는 1745년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관은 김해이고 아버지는 김석무이며 증조할아버지가 만호 벼슬을 지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것을 보면 본래 무반이었던 듯하나 김홍도가 태어날 무렵에는 중인 집안이었습니다.

미술에 엄청난 재능을 가졌지만 그림과 아무 연관이 없는 집에서 태어난 중인 소년이 당대 최고의 화가로 성장이 가능했던 것은 강세황이라는 훌륭한 스승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문인화가이자 명문사대부인 강세황에게 김홍도가 어떤 이유로 그림을 배울 수 있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고 합니다.

미술에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난 김홍도는 스무 살 이전부터 이미 도화서 화원이 되어 있었던 듯하며, 1765년 영조가 71세가 되어 여든의 나이를 바라보는 망팔에 이른 것을 축하하는 잔치를 열고 이를 위해 병풍을 만들었는데, 당시 스물한 살에 불과하던 김홍도가 병풍의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으며 갓 스물을 넘긴 나이로 임금의 큰 잔치의 그림을 혼자서 그려 냈다는 것이 당대 최고의 실력임을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1773년 스물아홉의 김홍도는 영조의 어진과 왕세손의 초상화를 그리며 그의 그림 인생에 중요한 인연을 또 한 사람 만나게 됩니다. 훗 날 정조가 되는 왕세손은 김홍도의 솜씨가 마음에 들어 정조는 김홍도가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후원자가 됩니다.

영조의 초상화를 그린 김홍도는 공을 인정받아 사포서의 감목관이라는 벼슬에 올랐다.

삼십 대에 김홍도는 "그림을 구하는 자가 날마다 무리를 지으니 비단이 더미를 이루고 찾아오는 사람이 문을 가득 메워 잠자고 먹을 시간도 없을 지경이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김홍도의 그림은 유명해지고 값어치가 높아지고 있었으며,

이 무렵 김홍도는 '신선도', '군선도', '선동취적', '생황을 부는 신선' 등의 신선도와 '서원아집도', '평생도' 등의 인물화와 '서당', '씨름', '타작', '우물가' 등의 풍속화를 그려냅니다. 

이 가운데서도 풍속화는 인물의 생동감 있는 묘사와 각 그림의 극적인 구성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을 매료시켰습니다.

김홍도의 풍속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일하는 백성들이며 서민들의 정서와 삶에 밀착된 그림들을 역동적으로 그려냈습니다.

이후 김홍도는 서른일곱 살이던 1781년 정조의 초상을 그리고, 그 상으로 경상도 안동의 안기찰방 벼슬을 받습니다. 비록 종 6품의 말직이기는 했지만, 화원으로서 누리기 어려운 영광이었다고 합니다.

1791년 다시 정조의 초상을 그리는 작업에 참여해 그 상으로 충청도 연풍 현감에 제수되어 중인 신분으로 오를 수 있는 최고 직책에 올랐지만 3년 뒤 행정적으로는 유능하지는 않았던 이유로 현감의 자리를 내주고 평민으로 돌아온 김홍도는 자유롭게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에 전념하여 산수, 화조, 인물화 등에서 여러 명작들을 완성해 냅니다.

50대에 이르러 김홍도의 그림들은 더 높은 경지로 오르고 있었습니다. 과감한 생략과 거침이 없는 붓길이 김홍도의 자신감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이 당시 김홍도의 대표작으로는 '해산선학도', '마상청앵도', '세마도'입니다.

이렇게 보면 수많은 그림들을 그렸고 당대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은 김홍도였지만 그의 삶은 어려웠으며, 건강도 좋지 않았다. 지필묵이 부족했을 정도로 가난했던 시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김홍도는 매우 뛰어난 외모의 소유자였다 라는 기록들도 있습니다. 김홍도의 생김새가 빼어나게 맑고 훤칠하니 키가 커서 속세의 사람이 아니다는 말도 있고, 아름다운 풍채에 도량도 크고 넓어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김홍도를 신선과 같다고도 하였다는 말도 전해진다고 합니다.

 

단원풍속도첩

단원풍속도첩 중 씨름

단원풍속도첩은 1970년 보물로 지정되었습니다. 25 엽으로 이루어진 화첩으로, 종이 바탕에 수묵과 옅은 채색으로 그려졌으며 크기는 각각 세로 27cm, 가로 22.7cm입니다.

단원풍속도첩은 그림 주변의 배경적 설명을 간단하게 처리하였고 풍속 자체에 역점을 둔 인물 중심으로 구성이 되어 박진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특히 이 그림은 원형 구도 등을 이용하여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회화적 효과를 높이고 있습니다.

그림의 인물의 표현은 철선묘와 정두서 미묘을 사용하였습니다.

이 묘법은 무명옷의 빳빳한 질감을 표현하는데 적합한 표현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짧고 꾸불거리게 방향의 전환을 주어 그림에 활기와 생기를 불어넣었으며, 둥글넓적한 얼굴에 둥글한 눈매를 지닌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서민상을 표출한 점과 등장인물들의 사실적이고 해학이 가득한 동작의 묘사가 풍속화가로서 김홍도의 엄청난 기량을 실감하게 합니다.

단원풍속도첩은 기와이기. 주막. 빨래터. 자리 짜기. 벼타작. 점심. 대장간. 논갈이. 서당. 무동. 점괘. 고누놀이. 씨름. 서화감상. 길쌈. 담배 썰기. 편자 박기. 활쏘기. 우물가. 고기잡이. 장터길. 나루터. 신행. 노중상봉. 행상으로 현재는 낱장의 형태로 떨어져서 분리되어 있다고 합니다. 

김홍도의 단원풍속도첩이 높게 평가받는 이유는 그림 속의 인물의 감정을 주변의 상황과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자연스럽게 나타냈다는 점이 큽니다. 특히 단원풍속도첩 중 '씨름'에서 가운데의 씨름꾼들을 보면 패배의 빛이 뚜렷한 얼굴 표정과 넘어가지 않으려고 상대방의 옷을 움켜쥐고 있는 모습에서 누가 이기고 지는지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씨름꾼들의 표정과 자세는 구경꾼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그림의 오른쪽 위에 있는 구경꾼들은 상체를 앞으로 굽히면서 승리를 독려하고 있고 오른쪽  아래의 두 사람은 넘어가고 있는 자신의 편이 안타까운지 입을 벌리고 놀라는 표정으로 몸을 뒤로 젖혀 표현하고 있지만 이와 반대로 그림의 맨 아래에 등을 보이고 있는 어린아이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씨름꾼들을 보는 게 아닌 엿장수를 바라보는 모습으로 재미를 주고 있습니다.

단원풍속도첩 중 '벼타작'에서는 그림의 왼쪽에 일꾼들이 볏단을 메어치는 장면을 배치하고 오른쪽에는 이를 지켜보는 마름을 그려 넣어서 마름과 일꾼의 대조적인 모습에서 신분간의 불공평한 관계에 대해서도 강한 풍자를 보여줬습니다.

풍부한 상황에 대한 설정과 감정표현 그리고 신분 갈등과 같은 사회적 풍자 등으로 김홍도는 단원풍속도첩의 여러 그림들을 재미있게 표현해 냅니다.

이렇듯 김홍도의 단원풍속도첩은 조선 후기 서민들의 삶을 반영하였다는 점과 김홍도의 절제 있고 박진감 넘치는 선묘로 통일감 있는 그림을 구성하고 풍자적이고 해학적인 장면을 연출하여 풍속화의 회화성을 한 단계 높였습니다.

이후 김득신, 신윤복 등의 화가들뿐만 아니라 19세기말, 20세기 초까지의 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게 된 작품입니다.

이번에는 조선시대의 화가 김홍도의 글을 작성해 봤습니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의 노래 가사에서도 단원 풍속도가 나옵니다. 해외의 훌륭한 화가들을 소개하는 글을 작성하다가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화가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어서 작성해 봤으며 단원풍속도첩 중 씨름이라는 그림도 정말 초등학교 교과서에부터 많은 분들이 보셨을 거라는 생각에 단원풍속도첩 중 어떤 그림을 대표로 올려볼까 고민하다가 씨름으로 올려봤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